“그런 거 다 따지면 일 못해요”
“그런 거 다 따지면 일 못해요”
  • 이로사 시민기자
  • 승인 2018.03.12 11: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로사 시민기자의 청소년노동인권이야기 <11>

이로사씨는 청소년인권복지센터 ‘내일’의 ‘일하는 청소년 지원 팀장’입니다. 청소년 노동인권 상담을 하며 경험한 이야기를 글로 풀어냅니다.

▲ 이로사 일하는 청소년 지원팀장.

2004년 봄,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선 곳, 당시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 나는 동료 A씨와 업무를 위해 방문했다. 방문을 마치고 나는 수고했다며 악수를 청하는 A씨의 손을 무심코 맞잡았고, 그는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내 손바닥을 긁었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순간 얼어버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고, 오후였다. 나는 주말 내내 신경이 곤두서있었고 사무실에 이를 어떻게 이야기할지 고민했다.

월요일 아침 회의 중에도 이 생각뿐이었다. 주위에 누가 있든 신경 쓰지 않고 남자 동료들과 성적 농담을 하는 그의 평소 행동으로 볼 때 개인적으로 이야기해봐야 자기 잘못을 인정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20대 후반, 그는 40대 중반. 과연 싸움이 될까, 싶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직장 내 성희롱이구나. 여기서 꺾이면 계속 먹잇감이 되겠지’ 가까스로 진정하고 얼굴이 벌게진 채로 회의 끄트머리에 입을 열었다.

지난주 금요일 출장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나는 매우 화가 났고, 공개적으로 사과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이 순간 후의 상황을 책임질 사람도 역시 나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과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장난이었다고 노발대발 역정을 내면서도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상사한테서 추궁을 들은 후 어쩔 수 없이 “사과한다”는 한마디로 대충 끝내버리려 했다. 내가 바란 결과가 아니었다.

순간 이 사건을 더 진전시켜야하나 고민했다. 성폭력 사건 피해자가 이긴 사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차선책을 택했다. “그럼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으세요” 당시 직장에선 그런 교육이 있는지 조차 모르던 시절이었다. 말 한마디로 끝날 줄 알았던 그는 교육을 받으라는 내 말에 오히려 화를 냈다.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가는 그를 나는 막을 수 없었다. 차라리 고소하겠다고 할 것을.

그렇게 싱겁게 성추행 사건은 무마됐고, 쉽게 삭히지 않는 내 분노는 그 후로 수년간 이어졌다. 일할 땐 늘 티셔츠에 조끼와 청바지를 입었고 전체 회식이 아니면 술자리를 가지 않던 당시 기혼이기도 했던 내가 성적 놀림감이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여성들이 직장과 사회에서 어떠한 불평등 조건에 놓여있는지, 왜 말을 하지 못하는지, 관심도 없었는데 갑자기 피해자가 됐다. 나는 이 사건 이후로 치마 입기를 주저했다. 여성임을 최대한 감춰야 비릿한 시선들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안전할 것 같았다. 소용없는 짓임을 알지만 그래도 그쪽이 마음이 편했다.

청소년 노동 관련 상담을 하면서 성추행이나 성희롱에 무방비로 노출된 일하는 청소년들을 본다.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한 말은 “그런 거 다 따지면 일 못해요”였다. 거의 매일 일어나는 성희롱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일자리를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나쁜 소문을 만들어내 괴롭히기도 한다. 감당할 수 없는 반응에 상처를 받느니 성희롱에 무감각해지는 쪽을 택한다. 또, 가해자가 손님이나 상사, 사장이다 보니 일하는 동안 개선되기를 기대하지 못한다. 사업장이 아주 작아 얼굴을 붉히고 나서 같이 일하기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임금체불 등을 가지고 상담할 때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희롱이나 성추행 피해 경험이 숨어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별 것 아닌 일처럼 넘어가려하기도 한다. 상처를 애써 숨기는 건 아닐까 걱정하면서도, 자각하지 못한 상처를 일부러 끄집어낼 필요는 없다고도 생각해 연락처만 건네고 만다.

‘ME TOO’를 보며 피해자가 얼굴을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현실이 너무나 비참했다. 추락한 대한민국의 민낯을 마주하기 고통스럽지만 계속해서 드러내주길 바란다. 폭력은 낱낱이 공개되고 피해자를 옹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