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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한 삼대(三臺)도 사라졌건만 봄빛은 누구를 위해 다시 푸른가[연재] 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13> 하북성 임장의 업성
허우범 시민기자  |  webmaster@isis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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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7호] 승인 2017.11.13  22:5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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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롭게 단장한 업성 삼대유지공원.
겨울들녘을 달린다. 차가운 날씨임에도 하늘이 뿌옇다. 황사다. 황사는 이제 계절에 상관없이 나타난다. 자연이 우리의 일상과 상식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흥망성쇠의 역사도 황사의 먼지 속에 켜켜이 쌓여있다. 저기 헐레벌떡 달려오는 역사도 먼지 속에 묻힐 것이니, 자연이야말로 천지의 제왕이다.

중국 왕조사는 숨 가쁜 전쟁의 역사다. 야심가들은 드넓은 대륙 여기저기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 확장했다. 중원을 차지하는 자가 대륙의 지배자였다. 전쟁은 필연이고 통일은 희망이었다. 그들은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무수한 백성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백성의 피로 자신들의 야욕을 채웠다.

하북성과 하남성은 중원의 노른자위다. 중원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났을까. 그중에서도 업성(鄴城)은 병가필쟁(兵家必爭)의 요충지였다.

병가필쟁의 요충지였던 업성

   
▲ 금호대 일부가 남아 있는 업성 유지.
업성은 하북성 임장(臨漳)현에서 남서쪽으로 20㎞ 지점에 있다. 업성은 육조고도(六朝古都)였다. 이곳은 조조가 원소를 격파하고 북방진출을 도모한 이후, 오호십육국시기의 후조(後趙)ㆍ염위(冉魏)ㆍ전연(前燕), 북조시대의 동위(東魏)ㆍ북제(北齊)의 수도였던 곳이다.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좌사(左思)의 ‘삼도부(三都賦)’ 중 하나인 ‘위도부(魏都賦)’가 탄생한 곳도 이곳이다. 하지만 역사적 명성과는 달리 찾아가는 길은 만만하지 않다.

자동차가 하북성 임장(臨漳)현에 들어섰다. 장하대교도 보인다. 업성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 몇 년 사이에 한적한 시골마을이 커다란 마을로 변했다. 쓰레기만 분분하던 공터는 주차장과 매표소가 됐다. 육조고도였음을 알리는 부조상이 거대하다. 예전에 없던 조조의 석상도 생겼다. 하지만 그뿐, 화려했던 업성의 유적은 언덕 위의 건물 한 채뿐이다.

조조는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제거하고 업성을 차지했다. 폐허가 된 이곳에 엄청난 경제력을 동원해 성을 쌓았다. 업성은 동서 7리, 남북 5리의 크기에 외성과 내성이 있었다. 외성은 7개의 문이, 내성에는 4개의 문이 있었다.

조조가 심혈을 기울인 삼대(三臺)

   
▲ 박물관에 복원 전시된 삼국시대 업성 모형도.
조조가 특히 신경 쓴 것은 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삼대(三臺) 건설이었다. 높이가 10장(丈)인 동작대(銅雀臺)를 중심으로 북의 빙정대(冰井臺)와 남의 금호대(金虎臺)에 각각 8장의 높이와 140여 칸의 집을 지었다. 삼대는 아치형 다리로 연결했다. “삼대가 우뚝 솟아 그 높이가 산과 같다”는 말처럼 그야말로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이었다.

서기 210년 겨울. 조조가 심혈을 기울인 동작대가 완공됐다. 조조는 이곳을 정치ㆍ군사와 문학적 활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시인이기도 한 조조가 그의 아들인 조비ㆍ조식과 함께 ‘건안문학(建安文學)’을 태동시킨 곳도 바로 이곳이다. 조식의 ‘등대부(登臺賦)’는 바로 이 삼대의 완성을 축하하며 지은 것이다.

영명하신 부왕 쫓아 즐겨 보세나
누대 정상에 오르니 이 또한 즐겁구나.
장대하고 확 트인 대궐을 보라
부왕의 성덕이 배어있음이로다.
높다란 문루가 우뚝 섰구나
두둥실 쌍궐이 하늘에 걸렸도다.
하늘을 찌르는 영봉관도 있구나
구름다리는 서쪽성루까지 이어졌도다.
장하의 물줄기도 휘돌아 흘러나가네
정원 가득 풍성한 과수들을 바라보노라.


폐허가 된 업성

   
▲ 회랑에 남아 있는 불두(佛頭) 없는 석상들.
폐허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와 시문을 새긴 비석만이 고적하다. “낮에는 장군들과 함께 적진을 깨뜨리고, 밤에는 문사들과 함께 화려한 대궐에서 시를 지었다”고 노래한 당나라 시인 장설(張說)의 시구는 어디쯤에서 되새겨볼 수 있을까.

오늘의 업성은 건물 회랑에 세워놓은 목 잘린 불상들과 다를 바 없다. 회랑을 돌아 돌계단을 오르니 금호대 정상이다. 보이는 것은 온통 너른 들판뿐이다. 그 옛날 영화롭던 삼대는 무너져 흔적 없고 그 자리엔 봄을 준비하는 농부들의 일손만이 분주하다. 유비의 성도와 손권의 남경도 건재한데, 조조의 업성은 어째서 이토록 철저히 부서졌는가.

업성은 580년에 수나라 양견(楊堅)에 의해 불태워졌다. 양견이 도시를 불태우기 전까지 6대가 370여 년 동안 도읍으로 삼았다. 양견은 왜 업성을 불태웠는가. 상주총관(相州總管) 울지형(蔚遲逈)이 이곳에서 양견의 찬탈을 반대해 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양견은 화근덩어리인 이곳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안양(安陽)으로 이주시켰다. 이때부터 업성은 황성옛터가 돼버린 것이다.

폐허가 된 채 남아있던 업성은 다시 장하의 범람으로 떠내려가고 파묻혀 버렸다. 오직 금호대 전각과 동작대 터가 남아 역사의 뒤안길을 쓸쓸히 되새길 뿐이다. 당나라 시인 잠삼(岑參)이 폐허가 된 업성을 시로 읊었다.

말에서 내려 업성에 올라가니
성은 황폐하여 보이는 것 하나 없다.
동풍이 들녘의 불길을 날리고
비운전으로는 날이 저문다.
성 남쪽 모퉁이에 동작대 남아 있고
장수는 동쪽으로 흘러 돌아오지 않는구나.
조조 궁중의 사람들은 다 떠나갔는데 해마다 봄빛은 누구를 위하여 다시 푸른가.


1500여 년 전 시인이 읊었던 감회는 오늘 업성을 그리며 찾아간 길손의 감회이기도 하다. 또한, 승리자의 노래에 묻혀 역사의 간극으로 사라진 이름 모를 모든 이들에 대한 애가(哀歌)이기도 하다.

   
▲ 봄을 맞아 농사준비가 한창인 삼국시대의 업성 터.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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