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추석 문화 70년 변천사
[추석특집] 추석 문화 70년 변천사
  • 심혜진 시민기자
  • 승인 2018.09.19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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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편에 밀가루? 민족 대이동의 시작

여기저기서 선물세트 광고 문자가 날아와 귀찮게 하더니 어느새 다음 주가 추석이다. 시골마을에서 살던 어린 시절, 추석은 동네 아이들과 밖에서 밤늦게까지 놀 수 있는 일 년 중 몇 안 되는 날이었다. 동산에 뜬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빈다는 명목이었다. 나름 낭만이 있었다. 도시로 이사를 온 후엔 친척들 집을 오가며 또래 사촌들 만나는 재미가 있었다. 친척어른들을 용돈을 주는 좋은 분과 안 주는 인색한 사람으로 구분해 맘속으로 호불호를 따지기도 했다. 어른들끼리 다투는 통에 사촌들과 사이가 어색해진 어느 명절도 떠오른다. 어쨌든 어딜 가도 먹을 게 많고 학교에 안 가도 되니 명절은 없는 것 보단 나았다.

어른이 되면서 명절은 애증의 대상이 됐다. 결혼을 한 후엔 더욱 그렇다. 선물을 고민하게 되고 편치 않은 관계의 친척이 떠올라 미리부터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래도 여성들이 주도하게 되는 차례상, 명절 밥상, 그에 따르는 노동의 고단함에 비할 순 없다. 상상만으로 숨이 막힌다. 그냥 혼자서 맘껏 쉬고 싶은 마음과 친지들과 웃으며 명절을 보내는 판타지를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겹친다. 명절딜레마다. 이맘때가 되면 여기저기에서 ‘명절우울증’ ‘명절 스트레스’란 말이 단골로 등장하니 나만 겪는 일은 아닌 듯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1950년 전쟁둥이인 엄마의 추석은 어땠는지 궁금했다. 엄마는 동네에 몇 가구 살지 않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추석 전부터 떡 만들 준비를 했어. 과정이 좀 복잡해. 누릇해진 벼를 훑어서 솥에 쪄서 말려. 다 마르면 절구에 찧어서 왕겨를 벗겨. 그 다음에 물을 촉촉하게 뿌려서 다시 또 살살 찧으면 누런 껍질이 벗겨져. 백미가 되면 다시 빻아서 가루로 만드는데 이것도 말처럼 쉽지 않아. 일단 빻아서 고운체로 가루를 내려. 그러면 위에 덜 빻아진 건더기가 남잖아. 그걸 또 빻고 체에 내리고, 빻아서 내리고,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는 거야.

그렇게 쌀가루를 만들어서 반죽을 해서 송편을 빚는 거지. 쌀가루 내는 건 단순한 일이라 대부분 애들이 했어. 오빠들도 하고 나도 하고 그랬지. 허리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근데 몇 번 집어먹으면 금방 없어져. 식구가 많은데 쌀은 귀하고 떡을 한없이 많이 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하기 싫다는 생각은 못했어.

당연히 해야 되나보다 했지. 추석이면 밤도 따먹고 감도 따서 소금물에 담갔다가 떫은 맛 빠지면 먹고, 제사 지내는 사람들은 찹쌀전을 부치기도 했어. 오빠들이 과자도 사줬어. 큰집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했는데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어. 기차 지붕 위에 올라가 앉아서 가기도 하고 기차 옆이나 뒷문에 매달려 가는 사람도 있었지. 가다가 떨어지면 죽을 텐데도 그땐 뭐 단속을 하지도 않았고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 아주 힘들었어”


# “명절 기분 안 난다”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서민들의 명절은 곤궁했다. 1956년 9월 20일 동아일보에 쓸쓸한 추석 풍경을 담은 글이 실렸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송편이라도 빚어서 제대로 추석을 셀 수 있었던 사람들이 서민층에는 과연 얼마나 될는지? 비가 와서 그런지 어린이들 때때옷도 아가씨들의 분홍치마도 좀처럼 구경할 수 없고 거리는 철시된 채 그대로 한산”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 추석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이번 서울의 추석 명절은 유난스리도 쓸쓸했다. 사월혁명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자숙을 한 탓인가. (중략) 가난에 우는 사람들은 아주 말이 아니었다. 조상에의 차례 올리는 것은 둘째치고 토란국 한 그릇에 송편 한 개 못 먹은 집도 수두룩하다. 더구나 어린 아들 딸들이 옹기종기 여럿 들끓는 집안에선 고무신 한 켤레도 못 사줬을 게니, 그 어버이의 구슬픈 마음들이 여북했으랴. 추석날 아침 어느 실직한 막벌이 사나이는 자기 집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죽었다. 그는 삼남 삼녀의 아버지다. (후략)” (1960.10.7. 동아일보)

이런 분위기는 1960년대 중반까지 쭉 이어져 “명절기분이 안 난다”거나 “날이 갈수록 세상인심은 거칠어간다”거나 “때때옷 입은 아이들이 줄었다”는 내용의 기사들을 볼 수 있다.

1962년부터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이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1970년대 들어 전국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직장을 얻은 도시민들의 삶은 조금씩 나아졌다. 신문에 추석상차림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리고 낭비 없는 명절을 보내자는 기사가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다.

“새 옷 한 벌 마련해서 1년을 입어야 했던 옛날엔 추석빔이 큰 비중을 차지했었으나 요즘처럼 바겐세일이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장만할 수 있어 의미가 별로 없다.(중략) 우리 전통에 추석에 특별한 선물을 하는 풍속은 없다. 요즘은 직장의 아랫사람이 상사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기회로 변모되어 묘한 풍조를 낳고 있다. 더구나 그 선물이라는 것이 고액의 상품전으로 변해 부정부패의 씨를 안고 거래되고 있는데 이는 불식해야 할 풍조이므로 상류층에서 솔선수범해야겠다. 꼭 감사를 표시해야 할 경우라면 달걀 2,3꾸러미나 쇠고기보다 값싼 닭 2마리 정도면… (후략)”(1971.9.30. 매일경제)

# 송편에 밀가루를

도시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대대로 농사짓고 살아온 이들은 웬만해선 땅을 버리고 도시로 가려 하지 않았다. 정부는 곡물의 가격을 낮추는 저곡가정책과 농민들을 도시로 보내는 이농정책을 펼쳤다. 땅을 빌어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농사로는 더 이상 먹고 살기 어려워지자 도시로 이주해 가난한 노동자가 되었다. 그 결과 1960년에 64퍼센트였던 농ㆍ어민이 1980년에는 31퍼센트로 감소했다.

저곡가정책은 애꿎게도 추석 송편에도 영향을 미쳤다. 쌀 소비를 줄여 쌀값을 잡기 위해 혼ㆍ분식을 장려하던 정부는 추석을 앞두고 송편에 밀가루를 30% 섞을 것을 지시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한다.

“농수산부에 의하면 추석을 전후해서 쌀과 찹쌀을 지나치게 많이 소비하는 관습을 깨뜨리기 위해 각급 행정기관 및 라디오 TV 신문 잡지 등 홍보기관과 여성단체 민간단체 등을 동원하고 가두방송과 전단배포 표어 및 선전물의 게시물 등을 통해 떡쌀에 밀가루 30%를 섞고 찹쌀을 원료로 하는 떡류 등은 가급적 만들어 먹지 않도록 전국적인 계몽활동을 벌이기로 했다”(1973.8.20. 동아일보)

송편에 밀가루나 보릿가루를 섞으라는 지시는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신문에 등장했다.

# 민족 대이동의 시작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됨과 동시에 명절마다 도시와 농촌 사이에 인구가 대이동하는 기이한 풍경이 생겼다. 아직 전국에 도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자가용을 모는 인구도 소수여서 대부분 기차와 버스를 이용했다.

“1년에 한 번 어김없이 찾아온 ‘민족의 대이동’ 추석 귀성 러시가 20일부터 막을 연다. 타향살이의 설움을 서로 달래고 막혔던 인정을 나누기 위해 이 기간 전 인구의 5분의 1가량이 고향을 찾는 등 활발히 움직인다. (중략) 서울역 앞에서 식당종업원으로 일하는 김분이 양(22. 경남 밀양)도 ‘농사지을 땅도 없이 남동생을 데리고 사는 부모들을 만나보고 종업원으로 일해 푼푼이 모은 돈으로 산 속옷 등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고향에 간다” (1980.9.20. 동아일보)

“명절을 즐기기 위하여 ‘내려가는’ 추석 전 날의 귀성객이란 정말로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지독함을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선 차표를 미리 구하는 순서에서부터 얼마나 힘든가를 이야기해야 되겠지만, 어찌 가까스로 차표만큼은 준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막상 당일에 이르르면 그 인파의 굉장함이라니! 그것은 사람의 물결이 아니라 불길이라고 표현해도 모자랄 지경이다”(1982.10.8. 동아일보)

# 급속도로 바뀐 추석 풍경

추석 풍경은 급속도로 바뀌었다. 더 이상 집에서 송편을 빚지 않고 떡집에서 사먹는 풍조도 이 무렵 생겼다.

“명절을 손쉽게 치르기 위해 떡집에서 송편을 사가는 주부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그러나 온가족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송편을 빚는 추석정취가 아쉽다”(1984.9.6. 동아일보)

“서울 종로구 낙원상사에 밀집해 있는 낙원, 평양, 이화, 남문, 1번지 등 15개의 유명한 떡집들은 송편을 사러 온 고객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고 있었다”(1988.9.25. 한겨레)

1990년대 중반부터는 “수도권인구 70% ‘추석연휴에 지방 안 간다’”(1995.9.7.한겨레) “‘추석성묘 안간다’ 45.5% 서울 주부 조사”(1996.09.22.한겨레) “주부 36% ‘송편 사먹을 것’”(1996.9.19.)과 같은 기사가 부쩍 늘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주부들의 명절 노동 문제가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제사음식 준비하느라 등이 휘는데 남의 집 일처럼 잠이나 자는 남편을 보고 있자면 울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명절 때마다 싸우는 데도 이젠 지쳤어요.’ 온 가족이 모인다는 점에서 명절은 가족축제지만 정작 축제를 준비하는 주부들 중에는 단순히 짜증스러운 정도를 넘어 몸살을 앓아야 할 정도로 명절형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예가 적지 않다” (1994.9.17.동아일보)

이에 1999년 여성민우회가 평등명절을 위한 다섯 가지 지침을 발표했다. 남녀가 함께 일하고 함께 쉬기, 제사는 여자형제도 함께 모시기, 시집과 친정 번갈아 방문하기, 제사 때 여자도 절 하기,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명절금기 없애기 등이다.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금기로는 “명절 때 여성들이 전화를 걸면 ‘재수 없다’고 하는 등 여성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지침이 발표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명절 노동은 얼마나 평등해졌을까. 각 가정에서 이를 도맡아 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떠올려보면 금방 답이 나올 것 같다.

2000년대부터는 명절 갈등이 곳곳에서 드러나면서 “취직은 했니?” “언제 결혼할 거니?” “살은 안 빼니?” “학교에서 몇 등 하니?” 등 가족 간에 서로 해서는 안 될 말이 소개되기도 했다. 최근엔 걱정을 가장한 잔소리에 가격을 매겨 놓은 ‘명절 잔소리 메뉴판’이 인터넷에서 회자됐다. 잔소리를 하려면 해당하는 값을 치르라는 뜻이다. “모의고사 몇 등급 나오니?”는 5만원, “살 좀 빼면 인물 살겠다”는 10만원, “회사 연봉은 얼마니”는 20만원이다. 가장 비싼 잔소리는 “너희 아기 가질 때 되지 않았니”로 50만원이었다. 마냥 웃을 수 없는 씁쓸한 현실이다.

70년 동안의 추석 기사에서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어느 시기든 그리운 명절은 현재가 아닌 과거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올해도 ‘예전 명절’을 운운하며 달라진 세태를 한탄하는 누군가가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시간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도 결국 그리운 과거가 될 거란 점이다. 소외되는 이 없이, 상처받는 이 없이, 모두 함께, 행복한 명절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