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운동사에 묻힌 노동사 발굴이 필요한 때
[세상읽기] 운동사에 묻힌 노동사 발굴이 필요한 때
  • 시사인천
  • 승인 2018.09.10 14: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김현석 인천민속학회 이사

인천을 ‘노동운동의 메카’라고 부른다. 가끔이긴 하지만, ‘조선의 모스크바’를 별칭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모스크바는 대구를 은유할 때 빌려오는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 인천이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데는 일제강점기나 광복 직후 사회주의 세력의 득세와도 연관이 있다.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따랐다. 노동자, 농민을 전면에 내세우며 등장한 새로운 국가는 식민 관료는 물론, 식민지 자본가와 지주에게 고통 받던 시대를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본보기처럼 보였다. 사회주의에 기초한 민족운동은 일제강점기 저항의 큰 물줄기 중 하나였다.

일본 자본이 줄기차게 들어와 대공장을 건설했던 조선총독부 치하의 인천은, 노동자들이 사회의 근간을 떠받치던 도시였다. 사회주의 항일운동가들은 인천의 공장을 운동 기지로 삼았다. 파업과 항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광복이 되자, 활동가들은 운동의 결실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공장 자주화 운동은 그런 시도 중 하나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인천은 다시 공장지대가 됐다. 대규모 공단이 들어서고 노동자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노동조건은 열악했다. 하지만 광복 이전과 같은 큰 관심은 없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저항했다. 힘은 미약했다. 유동우의 자전적 수기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 그토록 큰 호응을 얻은 건,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비참한 현장의 모습을 노동자의 목소리로 세상에 알렸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를 거치면서 봇물 터지듯 사람들이 인천에 쏟아져 들어왔다. 이른바 ‘존재 이전’으로 학교와 본업을 버리고, 노동운동을 위해 인천의 공장지대에 들어온 이들이 많았다. 이렇게 들어온 운동가들은 1987년 민주화운동과 노동자대투쟁에 큰 힘을 보탰다.

시대가 변했다. 인천에 있던 기무사는 건물만 바뀐 것이 아니라, 이제 기무사란 이름까지 개명됐다. 수배를 받고, 감옥에 가고, 고문을 받던 운동가들은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을 국가로부터 인정받는 세상이 됐다. 이른바 ‘명망가’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역사책으로 묶여 나오고, 민주화운동사는 한국사의 새 분야로 자리를 잡는 중이다.

이쯤 해서, 그렇다면 그 긴 시간을 이어왔던, 운동의 기반이었던 노동이란 무엇이었나, 궁금할 때가 됐다. 노동운동의 경험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노동의 기억은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을 기회를 아직 갖지 못했다. 공장 기계는 변하고, 기술은 발전했다. 운동사에 주목을 하는 동안, 정작 노동자들이 숙련된 몸으로 이끌어왔던 노동사는 역사에서 사라지는 중이다.

예를 들어, 한때 조판을 만들며 활판 인쇄를 담당했던 문선공은 지금은 사라진 노동자다. 글자를 찍던 납활자도 거의 찾기 힘들다. 조판을 끝내고,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 내는 몸짓은 고분의 벽화처럼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풍경이 됐다. 이런 것들을 역사학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해석하지 않으면 노동운동사는 헛것이 된다.

최근 산업유산이 각광을 받는다. 폐공장을 재활용해 여러 용도로 사용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공장을 채웠던 사람들의 몸짓을 잊으면, 유산이란 말은 무색하다. 노동운동사를 넘어선 인천노동사의 서술이 시작될 때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