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소녀의 성장담
|영화읽기|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소녀의 성장담
  • 이영주 시민기자
  • 승인 2018.04.09 13: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레이디 버드 (Lady Bird)

그레타 거윅 감독|2018년 개봉

안녕! 내 이름은 ‘레이디 버드’라고 해. 부모님이 지어주신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내가 나에게 이름을 지어줬지.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 날 좀 그냥 내버려 둬!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외곽 새크라멘토에서 엄격한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지어 부를 정도로 고집 센 열일곱 소녀다. 친구와 우정이 중요하고 첫 데이트에 호기심이 많다. 학교와 집에서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하는 게 끔찍이 싫다.

번화함의 상징인 뉴욕의 대학에 진학해 어떻게든 촌구석 새크라멘토를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엄마 메리언(로리 멧커프)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크리스틴을 레이디 버드라 불러주지 않고, 직전에 뉴욕에서 발생한 9.11 테러를 들먹이며 시립대학에 진학할 것을 강요한다.

사사건건 엄마와 투닥거리면서도 크리스틴은 제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 엄마 몰래 뉴욕의 대학에 입시원서를 내고 데이트도 즐긴다. 교사 수녀의 차에 장난을 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수학교사의 채점표를 몰래 내다버리기도 한다. 멋진 뉴요커가 되는 게 꿈이지만, 현실은 딱 비행청소년이다.

할리우드의 배우이자 감독인 그레타 거윅이 연출한 ‘레이디 버드’는 어서 빨리 어른이, 그것도 멋진 뉴요커가 되는 게 꿈인 크리스틴의 열일곱 성장담이다. 그레타 거윅의 자전적 이야기라 그런지 사건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가 찰지다. 이래저래 참견하는 엄마와 투닥거릴 때나 단짝친구 줄리(비니 펠드스타인)와 교실 맨 뒷자리에서 구시렁대는 모습은 마치 그 나이 때 나를 보는 것만 같다.

그 시절의 내가 그랬듯 크리스틴 역시 자신이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고, 그래서 걱정이든 관심이든 어른들이 간섭하는 게 몸서리치게 싫다. 그러나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는 큰소리는 지우고 싶은 흑역사를 써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집안도 부자고 자신을 소중히 대하는 줄로만 알았던 첫 남자친구 대니(루카스 헤지스)는 알고 보니 게이였다. 세상 고통은 자기가 다 짊어진 듯 멋스럽게 담배를 피우던 두 번째 남자친구 카일(티모시 샬라메)은 크리스틴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확실하다. 카일과 사귀려고 애쓰다 단짝친구 줄리와도 멀어졌다. 뜻대로 되는 게 없다.

대니의 할머니가 사는 멋진 대저택이 아니라 ‘철길 건너 구린 동네’에 사는, 아빠는 실업 상태에 엄마가 정신병동에서 야근을 해야 근근이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집안의 막내딸. 성적도 외모도 고만고만한. 뮤지컬반에 들어갔더니 맡은 배역이 이름도 없는 코러스. 특별한 존재이고 싶지만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함의 결정판인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버둥대지만 결국 남는 건 흑역사. 크리스틴의 열일곱은 그 시절을 거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야기다.

크리스틴이 사사건건 참견하는 엄마와 맞섰듯 그 시절의 나 역시 어른들의 세계가 같잖고 우스워서 교사와 부모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크리스틴이 지긋지긋한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뉴욕으로 가기를 갈망했듯 그 시절의 나 역시 도시에 대한 동경을 품고 서울로 진학했다. 10대 후반부 끝없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굴욕들과 현실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탈출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은 새크라멘토의 크리스틴이나 충청북도 청원군의 나나 매한가지였다.

그토록 평범함을 벗어나려 애쓰던 그 시절의 나는 이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중년이 됐다. 부끄러운 흑역사만 남긴 채. 그러나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특별한 나로 살기 위해 버둥대며 현실탈출을 꿈꿀 것이다. 그 시절의 좌충우돌이야말로 결코 평범하지 않은 ‘나’로 사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